이마이초 이마니시 가문의 윤곽을 아는 것은 일본 역사의 흐름을 아는 것입니다.
이마니시 가문 도치아가타누시는 시키히코 씨족입니다. 시키히코는 야마토 토착 씨족의 수장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조몬 시대 후반(약 4,000년 전)에 마키무쿠 강과 하츠세 강으로 둘러싸인 시키시마에서 이즈모 신을 모시던 가문의 수장이었습니다. 즉, 시키시마는 미모로 산의 측면을 가리키는 지역 이름입니다. 초대 진무 천황의 즉위는 기원전 660년(2,681년 전)이었습니다.
기원전 659년, 진무 천황은 시키의 아가타누시(현청장)를 구로하야 오토시키(시키히코의 동생)로 임명했습니다.
진무 천황의 동방 원정의 목적지인 시키 마을을 다스리던 시키히코의 동생 시키와 그의 부하 시키 야소타케루는 전멸당했고, 황군에 협력한 그의 동생 구로하야 시키에게는 공로로 시키노쿠니노스케(四季国の助)라는 칭호가 수여되었습니다(일본서기, 진무 천황 재위 초기, 긴시, 보우마년 11월).
진무 천황은 동생 시키 야소타케루가 군대를 모은 시키 마을의 가타이(카타이, 가타타타테라고도 불림, 아마도 도이치 군 이케노우치 아베 마을과 이케지리 가구야마 마을 근처)에게 이와레 이와레라는 칭호를 주고, 그를 카무 야마토라고 불렀습니다. 이와레히코노 미코토(일본서기, 오소키, 진무 천황 2년, 2월).
토착민 씨족의 또 다른 수장이었던 그의 형 시키는 싸움을 종식시키고 화해하여, 영산인 미모로산을 포위하고 이즈모의 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의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진무 천황은 동방 원정 이후, 황실의 중요한 권력 기반인 시키노무라를 다스리는 시키노쿠니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고, 고토시로누시노신(고사기에서는 오모노누시의 딸로 기록됨)의 장녀인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노 미코토(이스케요리히메)를 황후로 삼았습니다. 그 후 그는 고토시로누시노신의 차녀인 이스즈요리히메노 미코토(고사기에서는 시키 노부사의 딸로 기록됨)를 제2대 스이제이 천황과 결혼시켰고, 그 후 여섯 명의 황후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고사기에서는 제7대 고레이 천황의 황후였던 도이치 노부사노 오미의 조상인 오오메의 딸 호소히메의 이름을 일본서기에서는 시키 노부사의 딸 호소히메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도이치 노부사와 시키 노부사 가미가 같은 가문 출신임을 보여준다. 특히 고레이 천황과 도이치 노미 가문은 깊은 인연을 맺었는데, 호소히메는 제8대 고겐 천황을 낳았고, 제3대 안네이 천황의 셋째 아들 시키 노미는 와코쿠노 카히메 천황의 손녀였으며, 와코쿠노 카히메는 야마타이 국왕 히미코와 기비쓰히코를 낳았는데, 이들은 야마타이 국왕 히미코와 모모타로로 추정됩니다.
또한, 고겐 천황의 장남이자 사도(四道)의 장군인 오히코노 미코토와 타케무나가와노미코토도 같은 가문 출신입니다. 야마토 타케루 천황의 어머니인 하리마 이나히노 타이로히메는 이세노카미와 고레이 천황의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도이치 성주 나카하라 도타케의 차남 도이치 지로다유 토마사는 히로세 군 가와이에 있는 히로세 타이샤 신사의 주지 니기하야히노미코토의 후손인 소네무라지 히구치다유 마사유키의 양사위가 되어, 스스로를 가와이 민부 쇼유 나카하라 토마사라고 칭했습니다. 그는 8,000석이 넘는 영지를 가진 가와이 성을 축성하고, 1336년(엔겐 원년) 8월 28일, 동생 뉴도 도이치 신지로와 함께 5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다이고 천황을 수행하여 요시노에 입성했습니다. * (고코쿠 2) 1341년 2월 29일, 히로세 군 가와이 성(대일본자료 6-6-668)
(테이와 5) 1349년, 그는 구스노키 마사쓰구, 그의 동생 구스노키 마사토키, 그리고 뉴도 도이치 신지로와 함께 시조나와테 전투에 참전하여 구스노키 마사노리 휘하에서 싸웠습니다.
구닌슈 도이치 가문은 야마토 국 시키카미 군 하세에 본거지를 두고 있으며, 호키지 절(현재 이세 군 다와라모토초 호키지 절)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시황의 후손인 하타노카와카츠의 후손인 하세가와 가문의 도네(수장)를 지냈습니다. 또한 하타 가문의 후손으로 알려진 사쓰마 시마즈 가문과도 가까웠습니다. 후간지(나라현 이세군 타와라모토정 아지마)가 창건되었을 때, 선사 료도 신가쿠(1330~1399, 제아미와 같은 곳인 유자키 출신)가 사쓰마국 콘쇼지(가고시마현 이치키쿠시키노시 오사토)에서 불려와 창건자가 되었습니다.
사루가쿠를 비롯한 여러 활동에 참여했던 예능계 인사들도 가와카츠의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콘파루파입니다. 콘파루 젠치쿠는 『아케스쿠 슈쿠슈(阿曲造集)』에서 "하타 가와카츠의 세 아들 중 한 명은 무술을, 한 명은 악사를, 한 명은 사루가쿠를 계승했습니다. 이 무술을 계승한 자들의 후손이 바로 오늘날의 야마토 하세가와 가문입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마니시 가문의 역사는 도치성 성주 민부 다유 도타케의 차남으로 태어난 도치 지로 다유 토마사가 장인 히구치 다유 마사유키의 양아들이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히구치 다유 마사유키는 히로세타이샤 신사의 구지(신도 최고 승려)였으며, 8,000석이 넘는 영지를 소유하고 가와이성을 건설하고 스스로를 민부 쇼유 나카하라 토마사 가와이로 칭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이치 가문은 센고쿠 시인으로 유명하고 문학과 무예에 뛰어난 인물로 명성을 떨치며 교토 귀족들과 문화적 유대를 강화했던 도이치 가문의 시조 도타다 도이치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의 장남 도카츠 도이치 시대에, 일족은 쓰쓰이 준케이와 마츠나가 히사히데 사이의 치열한 전투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그의 딸 오나헤는 히사히데에게 인질로 바쳐졌고, 히사히데는 후에 그의 장남 히사미치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하자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회복했고, 류오야마 성은 도이치 일족의 수중에 돌아갔습니다. 가와이 곤베 기요나가가 이끄는 마츠나가 세력은 오나헤를 기치로 삼아 쓰쓰이 세력을 진압했습니다. 그러나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미요시 삼두정치와 동맹을 맺은 쓰츠이 준케이의 반격이 일어나 1566년(에이로쿠 9년) 2월, 그는 도카츠 도이치를 비롯한 가신과 가족을 거느리고 류오야마 성에서 이마이의 가와이 곤베의 저택(현재 이마니시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마이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혼간지와 꾸준히 밀담을 나누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75년(덴쇼 3년) 쇼뇨 때부터 오다 노부나가와 절친한 친구였던 혼간지 겐뇨가 이시야마 전투에서 싸우자, 오다 노부나가의 항복을 거부했던 지방 영주(도이치 씨와 가와이 씨)를 중심으로 한 이마이 마을 사람들과, 이코 이키의 잔당을 포함한 나가시마 이코 이키의 추종자들이 군대를 일으켜, 아케치 미츠히데의 휘하의 쓰츠이 준케이가 이끄는 오다 군과 약 반년 동안 싸웠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일향종(一向宗)의 교주 켄뇨(健女)가 노부나가에게 화친을 청하면서 이마이 마을은 명분을 잃고, 사카이 천하종(天下三宗匠) 삼대주 중 한 명인 쓰다 소큐(津田宗及)의 중재로 사면장(가시하라시 지정 문화재)을 받아 노부나가와 화친했습니다. 이후 혼간지와의 관계는 확고했습니다.
같은 해 겨울, 노부나가는 이마니시 가문의 저택 남쪽에 본거지를 마련하고, 무병장수를 조건으로 "만물 오사카 12개"라는 조건으로 의석이나 과세 등의 제한 없이 자치권을 부여했으며, 이마니시 가문에 행정권과 의사 결정권(오다 노부나가의 붉은 인장)을 부여했습니다. 노부나가는 보상으로 유명한 칼 세 자루를 하사했고, 본거지를 떠나면서 가족을 바라보며 "야츠무네(옛 이마이 읍청)"를 외쳤다.
*이마니시 가문의 저택 남쪽에는 다카이치 군이 오다 노부나가의 진영이 있던 곳을 기리는 신사가 세워져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공습으로 인한 화재를 우려하여 철거되었습니다.
1615년(겐와 1년), 이마이 서쪽에서 하시오 시게하루, 후세 하루유키, 반자이 도모츠구, 호소이 타케하루는 오사카의 오노 하루후사의 지휘 아래 고리야마 성과 백제사 일대에 불을 지르고 이마이고로 돌격하여 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가와이 키요나가(가와이 초자에몬 마사후유)의 활약으로 마을은 무사히 건재했습니다.
1621년(겐와 7년) 5월, 고리야마 성주 마츠다이라 다다아키라가 오사카 여름 전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가문을 방문했습니다. 연회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이 새겨진 라이쿠니토시 나기나타(장검)를 선물받았고, 이마이 성 서쪽 입구 방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마니시로 개명하도록 권유받았습니다(그는 나카하라 성을 유지했습니다).
1634년(간에이 11년) 이마니시 가문은 전국 최초로 막부로부터 화폐 발행 허가를 받아 조폐국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지 지폐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이마이 지폐"를 발행하여 74년간 유통되었습니다. 이마이 지폐는 높은 환전성과 신뢰성을 자랑했으며, 가문은 "바다의 사카이, 육지의 이마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이마이 센켄"으로 번영했습니다.
오사카 여름 진(夏の陣) 당시 이마니시 가문의 나가야몬(長屋門)은 도요토미 군의 공격으로 심하게 파손되었습니다. 1650년(게이안 3년) 7대 당주 이마니시 마사모리(今西正盛)는 이 집을 개조하여 야영지로 삼았고,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와 하이쿠 시인으로서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이 시는 이마니시 마사모리가 하이쿠집 『미미나시구사(耳無草)詞林金玉集』를 편찬할 당시 절친한 친구였던 마츠오 바쇼가 어린 나이에 하이쿠를 배우기 시작했던 1667년(간분 7년)에 쓰였습니다.
13대 당주 이마니시 마사이치로는 1870년(메이지 3년) 10월 이마이초 시청장으로 임명되어 마을 행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메이지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이마이초 근처에 기차역을 건설하는 계획에 반대했습니다. 이 대담한 결정 덕분에 무분별한 개발이 방지되었고, 이마이초의 거리 풍경은 보존되어 훗날 중요 전통 건축물군 보존 지구로 지정되었습니다.
1955년, 도쿄대학교 공학부 건축학부의 연립주택 조사 결과, 이마니시 가문의 저택은 1957년 6월 18일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650년 3월 22일자 용마루 명판도 함께 전시되었습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근본적인 보수가 이루어졌고, 이마니시 가문의 의뢰로 나라현 교육위원회가 1961년 3월에 착공하여 1962년 10월에 완공했습니다. 이 저택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이마이초 거리 풍경 보존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전국적으로 거리 풍경 보존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1975년 문화재보호법이 개정되어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 제도가 시작되었고, 전국적으로 거리경관 보존에 주력하게 되었습니다.
마이는 한때 고후쿠지(興福寺)의 소유였습니다(출처: 고후쿠지, 이치조인(一条院) 문서, 1386년). 1560년대에 이마니시(今西) 가문의 조상인 가와이 곤베이 기요나가(河合権兵衛清長)가 류오성(龍王山城) 함락 후 도치 도카츠(十市遠勝)와 그의 가신들과 함께 이 지역에 오면서 이마이초(今井町), 즉 이마이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 성은 가와이 가문과 관련된 도치 가문의 소유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에 맞서 싸우던 이마이고는 일향종(一向宗)과 연합하여 마을 주변에 해자와 토담을 쌓고, 마을 서쪽 끝을 지키기 위해 망루 등 여러 가지 적절한 시설을 갖춘 성곽 같은 건물(현재 이마니시 가문의 저택 터)을 건설하여 요새화했습니다. 이 시기는 이들이 일향종과 연합하여 당시 일본 최강자 오다 노부나가에 맞서 싸웠던 시기와 일치합니다. 당시 이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마을 주변에 해자를 파고 두꺼운 흰 담을 쌓았습니다. 나중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무장 해제되었지만, 자치권을 유지했고,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이웃 마을 사카이와 함께 번영했습니다. 이 마을은 "바다의 사카이"와는 대조적으로 "육지의 이마이"로 불렸습니다.
도쿠가와 시대에 사회가 평화롭고 고요한 시기로 접어들면서 높은 수준의 자치권이 확립되었고, 도쿠가와 막부는 이마이를 정(町)으로 공식 인정하고 자체 행정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에도(현재의 도쿄), 오사카, 교토, 나라에 설치되어 있던 "소도시요리(惣年寄職)"와 "마치도시요리(町年寄職)"라는 행정 관리 임명도 이마이에 맡겼습니다. 이마이에 소도시요리
제도가 확립된 것은 1621년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와이 요지베이(河合正冬), 후에 이마니시로 개칭)가 정무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가와세 뉴도효부보(河瀬入道兵衛, 후에 이마이로 개칭), 오자키 겐베이(尾崎源兵衛, 후에 우에다 주에몬(上田忠衛門)이 임명되었습니다.
나가타 교부다이유 다카나가는 오미 겐지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손자인 가와세 타로다이유 다카미츠의 아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승려직을 버리고 가와세 신자에몬 우지가네라고 자칭했습니다. 야마토의 도이치 가문과 가와이 가문의 지원을 받아 삭발을 하고 오사카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이시야마 혼간지 절의 켄뇨 쇼닌 코사 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이름을 가와세 뉴도 효부보로 바꾸고 이마이 가문이 가와이 가문을 위해 새로 지은 수행처인 쇼넨지 절의 주지가 되었습니다.
이마니시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소도시요리(総都しより, 마을 행정관)의 수장 역할을 했습니다.
카와이 곤베이 기요나가(이마니시 마사후유 개조)는 오사카 여름 캠프에서 도요토미의 기세로부터 이마이초 서쪽 출구를 보호했습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리품으로 이마이초의 이름을 이마니시로 바꿀 것을 건의했습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에게 전리품으로 일본식 창 "라이 쿠니토시"를 선물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1621년부터 스스로를 "이마니시"라고 불렀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법 및 경찰권을 가진 이마니시 가문의 저택은 이마이초 서쪽 출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해자가 있습니다.
저택 앞길은 예전에 사카이로 이어지는 큰길이었습니다. 서문 서쪽 끝에는 경비초소가 있었습니다. 저택의 외벽은 온통 하얀 석고로 덮여 있었습니다. 지붕 양쪽 아래에는 작고 평행한 지붕들이 있습니다. 지붕은 혼가와라부키(전통적인 기와지붕 양식) 양식으로, 웅장한 성곽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1650년 건축 이전에 이미 혼진(군사 본거지)과 가문의 거처가 존재했기에, 현재의 이마니시 가문 저택은 2기에 지어졌지만, 이마이 마을 서쪽 끝에 위치하여 위풍당당한 천수각의 분위기를 자아냈다고 전해집니다.
위층 오른쪽 정면 벽에는 가와이 가문의 문장이 있습니다. "카와"는 강을 뜻하는 일본어 글자로, 우물을 뜻하는 또 다른 "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벽 왼쪽에는 세 개의 마름모가 겹쳐진 가문의 깃발 문양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마니시 가문의 조상은 원래 무사 계급 출신이었으며, 불교 일광종(一向宗)의 혼란기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이 저택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현재 위치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주옥은 이마이쵸의 중앙 간선대로인 「혼마치스지」에 면해 북쪽으로 돌출하도록 하고 있었다.
자릿수 갈 수 있는 유키야마(15.854 미터), 양간 하리마 칠간(13.838 미터), 정면 처마, 일중, 일부 2층, 입모 가게 구조, 책 기와.
오오도구치를 들어가면 안쪽까지 다니는 흙간.
그 좌측에 6실을 2열에 배치해, 표보다 미세, 미세옥, 2층에 다다미가 2실이 있어, 바닥 사이를 마련해, 미세와 나카노마와의 경계에 상단 계조 단단 거리를 마련해 나카노마를 한층 높게 보여, 나카노마, 납호, 가장 뒤에 다이드 코로, 불간을 배치해, 이들 6실과 토간과의 경계에, 식대대를 마련해, 심판의 장소인 「하쿠슈 오시라스」라고 하고, 부지 거주 틀에 의해 판도를 넣고, 미세와 다이도코로의 가방과 부쿠로에 납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카노마에서 다이도코로에 이르는 이타도 도도에는, 웅시한 마츠타케 매화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단순한 엄중한 칸막이가 아니라, 지금 서가의 소년 기직으로서의 신분에 관계되는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 시모미세로부터 오오도구치에 걸친 가마코 2층 츠키니카니에게는 2방 있어, 훈훈하고 감싸인다고 해서 사용되고 있었다.또, 원화 원년(1615년) 무가 제법도가 발행된 이후에 백주 사이의 식대나 2층에 바닥 사이를 건축한 것이 당가가.
서쪽 집 안에는 넓은 "도마(堂)", 즉 흙바닥이 있습니다. 북쪽에는 바깥쪽으로 열리는 큰 미닫이문이 있습니다. 북서쪽 모서리에는 "시모미세(常御室)"라고 불리는 접견실이 있습니다. 총 여섯 개의 방이 있습니다. "미세노마(御御室)", "나카노마(内御室)", "다이도코로(台庫)"는 "도마"에서 이어집니다. 이 방들 뒤에는 "미세노오쿠(御御室)", "난도(内御室)", "부츠노마(佛斯室)"가 있습니다. 도마에는 기둥이 없어 널찍한 느낌을 줍니다. 난도에 있는 조다이가마에(朝大賀前)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조다이가마에를 난도가마에(南道駐前)라고도 합니다. 최소 14세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가옥에서는 뒷방 입구가 조다이가마에(朝大賀前)입니다. 문지방은 보통 높였지만 상인방은 낮추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는 유물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목재 소데카베 패널이 측면에 있는 단일 목재 미닫이문(카타비키 이타도)이나, 반만(half bay) 패널로 측면을 마감한 한 쌍의 미닫이문(이타도)이 가장 흔한 유형이었습니다. 측면 패널은 종종 강렬한 악센트를 주기 위해 디자인되었는데, 예를 들어 가시하라 나라 이마이초 이마니시 가문 저택(1650)의 갑옷 스타일의 목재 외벽(요로이 시타미 이타바리)이 그 예입니다. 패널로 마감된 문에는 문을 잠그기 위한 드롭 빗장(사루오토시)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패널로 마감된 문 뒤에 미닫이 방충망을 위한 추가 러너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머리 위로는 세 개의 큰 들보가 중앙을 지지하는 지붕의 골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전 감옥이 최근까지 존재했고, 이마니시 가문의 저택 서쪽에 이부시로(연기 고문실)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소도시요리는 흉악범을 감금하는 등 치안권도 행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당시 사용되었던 수갑은 오늘날까지도 이마니시 가문의 소유로 남아 있습니다.
이 건물은 이마니시 마사모리가 법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축했습니다.
"무나후다(棟札銘)" 건축 현판에 적힌 "게이안 3년 3월 23일 골조를 올렸다"는 기록에 따르면 이 건물은 1650년에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마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입니다. 본채 남동쪽 모서리에 있는 "츠노자시키(角座敷)"도 같은 시기에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을 고려할 때, 2층 자시키를 제외하고 이마니시 가문 주택의 구조 양식은 이마이 마을에 현존하는 다른 옛 민가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전자만 원형을 유지하고 다른 가옥들은 필요에 따라 개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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